목회단상 12242023 “빛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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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밤이 되면 언제나 등불을 들고 다녔습니다. 다른 사람이 등불을 보고 부딪히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참 사려 깊은 사람이지요. 어느 날 밤 그는 등불을 들고 걸어가다가 다른 사람과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등불을 잘 보고 다녀야 하지 않느냐며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합니다. “이보시오, 꺼진 등불을 어떻게 보고 다니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살펴보아라”(눅 11:35) 남의 등불이 아니라 자신의 등불을 잘 살피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빛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혹시 어둠은 아닌지 성찰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종교인들을 두고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마 15:14)고 말씀합니다. 등불이 꺼진 줄 모르고 어둠 속에 다니게 되면 위험한 일도 서슴없이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독일 고전주의의 2대 문호로 인정받는 실러와 괴테는 동시대에 살면서 문학적으로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실러는 선배인 괴테로부터 문학적인 격려와 영감을 얻을 수는 있었지만 따뜻한 삶의 온기를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실러는 괴테에 대하여 “그는 자신이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나, 타인을 위한 희생이나 봉사를 모르는 이기주의자”라고 평했습니다. 괴테는 장수하면서 나폴레옹 베토벤 모차르트와 같은 당대의 유명 인물을 모두 만났고 누구보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못다 한 생을 아쉬워하듯 “더 많은 빛을”이라고 외치면서 정신병원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더 많은 명예나 권력, 세상의 자랑이나 부를 구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모든 것을 다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단 하나의 빛, 이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 한 분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분이 계셨다고 한다면 그는 더 많은 빛을 구하며,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북유럽 노르웨이에는 인구 3500명의 작은 도시 리우칸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겨울이 시작되는 9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빛을 볼 수 없습니다. 위도가 높은 지역인 데다 해발 1883m의 가우스타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13년 10월, 산꼭대기에 거대한 세 개의 거울이 설치됐습니다. 태양이 그 거울에 반사되면서 도시 주민을 비췄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겨울철에 빛을 보고 생활할 수 있게 되자 주민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기발한 아이디어는 1913년 샘 아이드라는 사람이 지역신문에 낸 것인데 100년이 흘러서야 기술이 발전돼 실현된 것입니다. 이처럼 빛은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빛에서 참된 기쁨을 누려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별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태양처럼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는 항성이 있고 지구처럼 빛을 반사하는 행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별이라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빛을 만들 수는 없어도 비출 수는 있을 겁니다. 성탄은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빛을 맞아드리게 될 때, 진정한 성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생명의 빛, 소망의 빛을 절망과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비추면서 살아가 보고 싶지 않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생명을 주신 주님의 빛을 찬란하게 비춰주는 날마다의 삶을 보내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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